현대 남성은 사회적 거세를 당한채 살아간다.

지나가다 남을 쳐다볼 수 있는가? 남의 눈을 피하는 게 예의인 사회.
외국에 몇일만 있다가 와도 한국이 얼마나 삭막한지 느낄 수 있다.
걷지 못하는 갓난아이와 아내가 있다. 그들을 숲 깊숙이 숨겨놓았다. 당연하지만 나는 그들을 지키고 먹을 걸 구해야 한다. 그때 움직이는 동물을 발견했다. 쳐다보지 않을 수 있는가?
아니면 본적 없는 사람이 내 영역에 들어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의상 눈을 피해야 하는가?
백번 양보하여 사회가 진화해서 안전해졌다고 쳐도 눈을 마주치면 웃으면서 인사하면 그만인 것이다. 좀 쳐다본다고 뭐가 그리 기분 나쁜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지킬 가족이 있는가? 현대는 남녀가 같이 음식을 구하고 아이는 남에게 맡긴다.
같이 하는게 좋은 건 알겠는데 문제는, 남자는 자신이 책임질 것이 없거나 적으면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남자는, 수컷은 일부 동물을 제외하곤 자기 가족을 목숨을 걸고 지킨다. 무거운 짐을 든다.
남자는 권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책임이 중요하다. 남성은 뭔가를 책임져야 한다. 그게 아내든 자식이든 부모든 친구든 약자든 누구든 간에. 반면에 여자는 권리가 중요하다. 자신이 성해야 아이 젖을 먹이고 후대를 남길 것 아닌가. 고등동물이라 어미가 절대적으로 긴 시간 동안 아이를 키우도록 진화했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권리가 아니라 책임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눈은 깔으라 하고 지켜줄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럼 우리는 뭘 해야 할까?
파이트 클럽을 보면서 엇나간 가상의 남자들에게 위로를 받으면 된다.

남자라면 영화 내내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하는데 묘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아니 왜 이렇게 신나지?"
"왜 저기 끼고 싶은 걸까?"
이유인즉슨, 파이트 클럽은 잃어버린 남성성을 되찾아주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잔혹성과 폭력성은 생존을 위해 필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생존이 가능하다. 파이트 클럽은 그 지점을 정확히 찾아서 박박 긁어준다. 시원하게.
간단히 말해 "왜 오락실에 펀치 기계가 있는가?"를 잘 설명해주는 영화.
싸우지 않을 거면 정교한 뇌가 필요할까?

영화 역사상 최고의 반전 영화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시나리오도 분명 훌륭하지만 주인공 두 배우의 연기가 출중하다. 상반된 성격이 융화되고 다시 떨어지는 자연스러움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어 보게 만든다.
영화 내내 장난을 친다. 찰나의 시간에 짧게 다른 영상이나 타인을 보여준다. 브래드 피트의 직업을 설명하며 더 재밌어진다. 예전 광고에서 썼던 기법인 '서브리미널'은 현재 무의식을 조종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하고 있다.

책임질 것도 없고 할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우리는 뭘 해야 할까?
아파트에 스마일 모양으로 불이라도 질러야 할까? 아니면 건물을 폭파시켜야 할까?

덤으로 영화 내내 브래드 피트의 30대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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