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쇼 (Peter Weir): 양육의 목표는 독립
소아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는 양육의 목표가 독립이라고 했다.
이 영화는 부모들에게 '독립'에 대한 가르침과 경고를 한다.
단순히 '미디어의 윤리성에 대한 영화'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탁월한 작품이다.
현실비판을 트루먼 버뱅크(짐 캐리)를 통로 삼아 나의 현실로 옮겨왔기 때문에.
표면적 주제는, '가짜 세상에 살고 있는 트루먼이 어떻게 가짜인지 발견하고 진짜 세상으로 탈출하는가'이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질문은 '트루먼과 나는 무엇이 다른가?'이다.
광고로 대표된 자본주의, 자신이 탁월한 예술가라고 착각하는 연출가가 내 삶 곳곳에 침투해 있다. 대부분 트루먼과 나, 즉 현대인은 거의 비슷하다. 딱 하나 나보다 트루먼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건 이 침투가 가족에게까지 전이하였다는 것이다. 트루먼이 극 중 나이까지 자살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진정한 친구(말론)라고 믿는 사람이 모든 걸 중화시키는 장면을 여럿 넣어서 어느 정도 구색은 갖췄지만, 그럼에도 트루먼은 환경에 비해 믿기 힘들정도로 정상적이다.
또 한 발 내딛어보자.
극 중 부모로 상징되는 연출가 (크리스토프)는 그를 속이고 조종하고 어떻게 해서든 내가 창조한 이 세계에 머물며 자신의 인생으로 남아주길 원한다. 왜 부모는 세상의 문을 열고 나아가려는 자신의 자식을 만류하는 것일까? 단순히 어두컴컴하여 위험할지 모르기 때문에?
자식 없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아이를 위한 것인지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인지. 이것이야 말로 분리 불안이다.
분리불안은 아이에게만 적용되는 용어가 아니다. 왜 부모가 가스 라이팅의 주체가 된다고 하겠는가? 부모야말로 두려운 것이다. 낳아준 키워준 나를 버리고 떠난다는 게 두렵고 나 말고 다른 사람과 가족이 되는 것도 두렵다. 서투룬 아버지는 딸의 결혼식에 불참하는 경우도 있다. 사이가 나쁜 게 전혀 아닌데도 말이다. 대표적인 분리불안 증세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우리 부모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성인이 된 내 아이와의 작별이다.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아이의 독립, 또 그 이전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