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프 픽션(Pulp Fiction): 타인에게 반했을때 나오는 압도적인 동기와 에너지

돠기 2022. 6. 1. 22:58

 

 

 약 20년 전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시험기간이었다. 내일은 '생물' 시험을 보는 날. 시험 범위는 교과서 약 70페이지. 난 항상 하루 전에 벼락치기를 하기 때문에 탱자탱자 놀다가 그날 독서실에 갔다. 미리 공부하던 학생들이 휴게실에 모여있었는데 뭔가를 모르는 것 같았다. 들어가 보니  얼굴만 아는 애들이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얘기해본 적 없는 여자애가 손가락으로 생물책 특정 페이지를 짚으며 나에게 물어봤다. "이게 뭐야?" 아마 DNA 전사(transcription) 뭐 그런 것들이었을 것이다.

까만 피부에 안경을 끼고 예뻤다. 나는 "읽고 올께" 라고 말하고 공부를 시작하려 들어갔다. 나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물어본것 이외에도 나는 내일 생물시험에 나올 모든 걸 다 알려주고 싶었다. 예쁜 여자애가 나에게 물어보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전무후무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매분 매초가 그 아이를 다시 만나서 원하는걸 전부 들어주고 싶은 맘뿐이었다. 나는 전부 다 알려줄 것이고 이 여자애를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나? 그녀가 날 좋아할지도 모르잖아!

 70페이지를 숙지하는데에는 약 두 시간 정도 걸렸다. 나는 내 자리에서 단 한순간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시간 만에 소위 '가르쳐줄 준비'를 마친 나는 의기양양하게 휴게실로 향했다. 그런데 아 이런, 그 아이는 가고 없었다. 다들 집에 가버렸다. 나는 허탈하게 돌아와야 했다. 허탈해서 그날 더 이상 공부도 안 했다. 

 그런데 다음날 시험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답을 맞춰보니 주관식에 맞춤법을 틀려서 2점 감점된 것을 제외하고는 틀린 게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 2시간 공부하고 고등학교 3학년 생물II 시험을 98점을 맞았다. 내 인생에 이 정도 효율은 더 이상 없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1. 동기: 까맣고 예쁘고 안경낀 여자애의 마음을 얻고 싶다.

2. 방식: 내가 공부하는게 아니라 '가르쳐 주려고' 공부한다.

 대학생때 공부에 흥미를 잃었지만 나는 알고 있다. 공부하려면 명확한 동기가 필요하고, 그냥 공부하는 게 아니라 가르칠걸 목적으로 하면 효율이 극대화된다는 것을. 가르친다는 건 '말을 한다'와 상통한다. 그래서 배우고 그걸 이해해서 내 식으로 남에게 이야기를 하면 잊지 않는다고 한다.

 

 


 

 

 영화 리뷰에 이런 헛소리를 계속 하는 이유가 있다. 예상컨대 나의 고등학생 시절의 이 감정이 쿠엔틴 타란티노가 우마 서먼에게 느꼈을 감정과 비슷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포스터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얼마나 우마 서먼에게 반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 시작하면서 끝날 때 까지 계속 드는 의문이 있다.

 

" 별것도 없는 이야기 투성인데 왜 이렇게 재밌는가?"

 

 갱스터 나오고 총나오고 서로 죽이고 강도질하고 때리고 싸우는 영화가 어디 한둘인가?

펄프 픽션은 본 적 없는 상황이나 특출 나게 재밌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 필요 이상으로 긴 장면들이 너무 많다. 평소 같으면 꼴 보기도 싫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든다. 그냥 재밌다.

 

 도대체 어디가 이렇게 재밌는걸까?

 

 

 

 

 

천생연분

 

 

 

1. 대화

빈센트와 쥴스의 대화들이 너무 재밌다. 둘은 관념을 '대하는 태도'는 비슷한데 '보는 관점'은 달라서 사사건건 충돌한다

 여러 상황에서 친구를 만나다 보면 말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나도 고집이 센 편이라 그런 류의 친구들을 만나면 언쟁을 자주 벌이곤 했다. 영화 내에서 신의 존재 유무나 기타 시덥잖은 주제들을 가지고 계속 싸워대는데 그 상황이 갱스터가 임무를 진행하면서 벌이는 상황이라 이질적이고 재밌다. 예컨데 사람 죽이면서 부먹 찍먹으로 말싸움 하는 상황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이런 개그는 조금만 틀어져도 꺼버리고 싶은 영화가 되는데 펄프 픽션은 다르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워낙 출중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만든다.

 

 

이 영화 최고의 연기

 

 

 

 

 

2. 우마 서먼 (미아)

 이 영화의 에너지는 우마 서먼에게서 나온다.

영화 시작하고 1시간이 지난 뒤 수수께끼 같은 의아함이 찾아왔다. 왜 이 영화가 재밌는지 이유를 못 찾겠다. 별거 없는데 뭐가 재밌는 걸까? 한참을 생각해보고 깨달았다. 그러니까, 마치 감독이 우마 서먼이라는 여자를 관객인 내게 소개팅 시켜준 것과 같은 연출을 한 것이다. 예쁜 여자와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어색함을 극복하고 편안함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그 다음까지 약속된 상태. 소개팅 많이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과정이 쉽지 않다. 거기까지 가는데 많은 심적 에너지가 소비되고 그렇게 한다 한들 잘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우마 서먼이 나오기 이전에 존 트래볼타(빈센트)를 관객 입장에서 나 자신이 되도록 잘 설득하고 그 이후에 우마 서먼을 만나 즐겁게 해주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즐겁고 만족스러운 성공적인 소개팅'이 완성된다. 이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진행한 쿠엔틴 타란티노가 대단하다.

 

 

 이건 그냥 할 수가 없다. 아마 쿠엔틴 타란티노는 우마 서먼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을 것이다. 그 에너지를 차분히, 천천히 배열하여 아주 훌륭한 영화를 탄생시킨 것. 이건 그들이 연인관계가 되고 우마 서먼이 '복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게 되면서 쿠엔틴 타란티노가 '킬 빌'의 시나리오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다.

 

 

 

 

 

3. 여자(의 발)

 쿠엔틴 타란티노는 여자를 아주 좋아한다. 그냥 여자가 아니라 여자의 ''을 특히 좋아한다. 그의 모든 영화에 여자의 발이 나온다. 이 영화에서 빈센트와 쥴스의 논쟁에서도 '발 마사지'가 나오고 레스토랑에서 여성의 발을 매우 관능적으로 연출한다. 자신이 왜 여자가 좋은지, 왜 여자의 발이 아름다운지를 이해하고 그걸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알려준다. 

 

배우분 약간 민망했을듯

 

 

 

 

 결국 쿠엔틴 타란티노가 우마 서먼을 만난 건 여러 의미로 그에게 행운이다. 짧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했고, 그의 훌륭한 작품들을 만드는데 거대한 동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감독이 단역으로 출연하는걸 나쁘다 볼순 없지만 너무 길게 나왔다. 내 입장에선 영화 집중하는데 약간 방해된 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