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에 호주 워킹홀리데이 갔던 시절 우연찮게 만났던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그중 몇몇과 친해졌고 나중에 성인이 된 그들과 만나게 되었다. 연애경험이 많지 않은 나는 몰라보게 성숙한 여성 두 명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여자로 보인 것이다. 그렇게 밥을 먹고 노래방을 가자고 해서 갔다가 거리를 걷는데 둘 중 외향적인 아이가 혼잣말 처럼 했던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오빠가 우리를 데리고 다녀야지..."
필요할때 딱 딱 원하는 걸 주고 달콤한 말을 해주는 센스 있는 남자. 그 아이는 내가 아니라 영화 '디센트' 같은 남자를 만났어야 했다.
마치 교과서 처럼 잘 짜여진 공포영화 디센트.
영화 중반까지 괴물이 나오질 않는데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그만큼 잘 만들었다.
그냥 동굴 탐험하는 영화로 만들었어도 재밌을법한 훌륭한 영화다. 관객이 어느 타이밍까지 지루하지 않을 수 있고, 어느 부분까지 보여줘야 무서워하는걸 영화 막바지까지 유지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여 기가 막히게 잘 배치했다.
사실 놀래키는 장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예민한 편이라 그런 것도 있고, 마치 유튜브 먹방이나 ASMR처럼 인간의 감각을 남용한 거짓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포, 호러 영화는 그러려고 보는 것이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나오는 놀래키는 장면들을 매우 적절하고 짜임새 있게 집어넣었다.
공포영화 보고싶은데 잘 못 보는 타인과 함께하시길. 급속도로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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