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거짓도 고통도 없는 지하 왕국이 있었다.
그곳에는 인간 세상을 동경하는 공주가 살고 있었고, 푸른하늘, 산들바람과 따스한 햇볕을 꿈꿨다."

영화 시작과 함께 고통과 거짓이 없는 지하 왕국을 설명한다. 여기는 어디일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고통은 '인생'을 의미하고 거짓은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도 없고 인생도 없는 세상이 있을까?
있다.
죽음이다.
지하 왕국은 무의 세계, 죽음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나오면 빛에 눈이 멀고 기억을 잃는다. 즉 탄생이다.
이 영화를 요약하면 '인간이 태어났다가 다시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 정도로 보면 될것이다.
전반의 내용을 보면 스페인 내전 이후의 저항군과 정규군의 전투를 판타지와 교차하며 정교하게 이끌어 나간다. 이 자체의 이야기 전개도 재밌어서 지루할 틈이 없다. 참혹한 전쟁 와중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굴(판의 미로)로 주인공을 부르는 판타지가 전개된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전쟁중에 토끼굴로 오라고 주기적으로 우리를 손짓하는 영화.
다만 토끼굴(판의 미로)에 들어간다는건 죽음을 의미한다. 즉 토끼굴로 들어간 다음의 신나거나 기묘한 모험은 없다. 아쉽지만.
판이라는 존재는 삶과 죽음의 인도자. 그는 오필리아를 진정한 자아를 깨닳은 모안나 공주라고 하며 선택의 책을 준다. 인생은 자고로 '선택'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걸 암시한 이름이다. 판은 임무를 지속적으로 주고 질문은 받지 않으며 죽음까지 인도한다. 집사인 척하는 신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페일맨은 인생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알면서도 당하는 인간을 잘 묘사했다. 우리는 억울하다. 알려주긴 했지만 왜 굳이 맛있는 음식을 탁자 위에 쌓아 놓는단 말인가? 먹어도 고통 안 먹어도 고통이다. 삶의 선택에는 무조건적인 희생이 강요되고 거기엔 고통이 따른다.
힘겹게 칼까지 훔쳐 지하왕국으로 가는 문에 도착한 오필리아는 모안나가 되려면 타인을 희생해야 한다. 그걸 포기하여 죽음에 이르자 오필리아는 지하 왕국에서 진정한 모안나 공주로 태어난다. 죽음에 대한 감독 나름의 통찰이 엿보이는 순간이다.
짧은 시간에 삶과 죽음을 판타지와 잔혹한 현실로 정교하게 그린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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