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지이지만 언제나 좋을 수는 없는 법.
갈등이 생겨 아버지한테 대들면 우리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한다. '지가 부모 없이 났어?'
그렇다. 아버지는 나를 만든 사람이다. 그 말인즉슨 내가 아버지를 선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영화가 음울한 이유는 역사적 사실이란 건 제쳐두고 영조가 아버지이자 직장 상사(사수)인데 나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직장 상사가 나를 싫어하면 삶이 어찌 되는 줄 아는가? 나는 안다. 싫어하는 눈빛과 표정을 하루 종일 주 5일 견뎌야 한다. 그리고 내가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구별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조롱의 메커니즘에 흠뻑 빠져 내가 잘못한 것 찾는 게 제일 강렬하기 때문에. 그런데 사도세자는 이걸 아버지가 죽는 날까지 견뎌야 한다. 아버지는 왕을 천년만년 하고 싶어 하고 채식을 하고 건강이 매우 좋다..
'사도'라는 영화는 아쉽고 안타깝고 아까운 영화다.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다 아는 사실들만 보여주고 싱겁게 끝났다. 싱거운걸 제대로 했다는 게 너무나도 안타깝다.
좀 더 강하게 얘기해 보자면, 도대체 이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이퍼 리얼리즘을 영화로 하겠다는 건가? 그러기엔 극 중 배우들이 너무 많은 다른 영화에 등장하였고, 이게 실제일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다가오기엔 시작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내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돌이킬 수 없는 아쉬운 점 두 가지를 짚어본다.
사도세자의 변화가 영화 내내 거의 감지되지 않아 안타깝다.
처음엔 멀쩡하다가 연산군 급의 정신병자가 되는 과정으로 더욱 극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줬어야 했다. 대중을 상대로 한 예술 아닌가? 러닝타임은 2시간인데 가장 중요한 것들은 놓치기 일쑤인 영화다. 영조가 싫어하는 과정은 개 그림이나 문헌 외우지 못한 장면 몇몇에 그쳤다.
가장 아쉬운건 정조의 묘사다. 아역배우의 연기는 예전 정태우의 단종이 떠오를 정도로 출중하였다. 하지만 이 영화의 모든 해소되지 않은 막막함, 답답함을 정조의 부채춤으로 퉁치고 끝내는 것이 합당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답답하기 때문에 오락영화도 될 수 없고, 아이들에게 역사로 보여주기엔 보호자가 앞뒤 설명을 너무 많이 해줘야 한다. 가령, 사실 영조가 저렇게 좀스러운 사람만은 아니고~ 사도세자가 억울하긴 하지만 잘못한 게 훨씬 더 많은데 영화에선 너무 조금 보여줬으며~ 특히나 정조는 저렇게 울다가 부채춤만 춘건 아니고 역대 조선왕 중 가장 위대한 '정치'를 했다고.
분장 잘했고 영상미가 좋다고 자랑하기엔 놓친 게 너무 많은 영화.
그 와중 송강호의 연기는 훌륭했다. 우리 한국 국민에게 보여준 영화가 한 두 편이 아닌데 다시 한번 새롭게 다가오는 배우. 이번에도 송강호로 보이지 않았다는 데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영조의 연기가 어찌나 훌륭하고 지질한지 영화 중반부 부턴 화면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0) | 2022.05.17 |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홍상수): 돼지들의 비겁함에 대하여 (0) | 2022.05.16 |
트루먼 쇼 (Peter Weir): 양육의 목표는 독립 (0) | 2022.05.13 |
영화 박쥐 (박찬욱): 죽는 사랑 (0) | 2022.05.11 |
매트릭스: 리저렉션 (0) | 2021.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