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자는 과거를 잊고 기대를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영화를 통해 장자는 우리에게 인간은 어리석어서 내 말을 따를 수 없다고 조롱하는 것 같았다.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여러모로 장자의 통찰을 정반대로 실현했다.
제작진은 과거에 집착했고 나는 엄청난 기대를 했다.
매트릭스는 내 인생 최고의 영화다. 이 비범한 형제, 아니 자매가 잘 마무리한 시리즈를 20년 만에 다시 만드는데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거기에 뒤따르는 엄청난 기대를 충족해 줄거라 예상했다. 웬만큼 잘 만들지 않으면 안 만드니만 못한 졸작이 될 거란 의심을 박살 내줄 것이라 확신했다.
영화에서 스미스가 이 세상은 이분법적이라고 말한다. 선과 악 흑과 백...... 그리고 앤더슨과 스미스.
잘 마무리 지은 시리즈를 다시 끄집어내도 마찬가지다. 적은 확률로 전작을 뛰어넘거나 높은 확률로 전작에 먹칠을 하거나.
제작진은 과거를 극복 하지 못하고 전작의 연출을 거의 베끼는 식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전작을 회상이라는 명목 하에 수 없이 날것 그대로 갖다 넣었다.

초기 구성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헷갈리는 극 중 상황 , 1편 모피어스의 대사 What is real? 을 관객이 느낄 수 있게 잘 만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그럼 그렇게 매트릭스에 세뇌당한 네오를 왜 구출한 건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이야기 초반의 주요 목적인 네오 구출이 거의 '그냥' 구한 거나 다름없다. 세상을 구한 네오가 매트릭스에 갇혀 기계에게 에너지나 공급하고 있다니 말도 안 되니까 구한 거다. 어쩌라는 건가?
점입가경이다. 이 과정으로 러닝 타임 148분 중 거의 절반을 할애하고, 이번엔 트리니티를 구출해야 한단다. 세상에, 몸에 철근이 관통해서 죽은, 네오를 끝까지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극 중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끝낸 그 트리니티가 살아 있단다.

여기서부터 라나 워쇼스키의 뻔한 열망이 드러난다. 강한 여성 주인공. 네오를 구출한 것도 여성이고 극 중 네오만큼 혹은 네오 보다 강해진 트리니티도 물론 여성이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극중 절정이 가관이다. 이제 네오는 자신이 평범한 유부녀라 믿고 있는 티프(트리니티)를 설득(빨간약을 먹도록) 해야 한다. 설득하지 못하면 인류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소위 꼬시지 못하면 지구 멸망이다. 왜 이런 네오가 파란 약 먹는 것 같은 말도 안 되고 재미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는 시나리오를 쓴 걸까?
페미니즘, 성 소수자를 위하는 창작자들이 남성 중심 사회에 물들어 성장하여 오는 보편적 저주다. 여성을 중심으로 관객을 설득하며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방식이 어색하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싶은데 머릿속엔 강한 남성밖에 없다. 그냥 감정이 중요하다고 밀어붙이면 그게 여성을 잘 표현한 영화일까? 인정사정없는 야생보다 더한 참혹한 세계에서 왜 꼭 여성은 감정을 중시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여성 폄하 아닌가? 그 누가 유부녀를 설득 가능한지 여부를 가지고 운명을 결정하는 것을 한 영화의 절정으로 보고 싶겠는가? 네오가 트리니티를 설득하지 못하면 네오도 붙잡히고, 네오와 함께한 동료들은 전부 죽고, 시온의 후계 도시인 이오도 위치 노출의 위험이 있다. 그걸 걸고, 인류의 운명을 걸고 트리니티를 설득하는 거다. 공감이 가는가? 그리고 148분짜리 영화의 절정으로 적합한가?
뻔한 대화가 끝나고 이젠 좀비가 튀어나온다. 워킹데드 보는 줄 알았다. 트리니티와 네오는 '봇'이라고 하는 좀비들을 밀치며 질주한다. 매트릭스에선 새로운 설정이겠지만 나에겐 아니었다.
엔딩엔 시간낭비 잘했냐며 도장까지 찍어준다. 무지갯빛 하늘로 물들이고 싶다고. 식상하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하다.

이 영화와 '더 라스트 오브 어스 2'를 비교하며 마무리한다.
두 작품은 매우 유사하고 또 극명하게 다르기도 하다.
여성, 성소수자들을 옹호하고 그들을 위한, 그들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는 점은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더 라스트 오브 어스 2는 전작을 극심하게 의식하고 강압적으로 뛰어넘으려 했다. 반면에 매트릭스는 조용히 커피 한잔 마시며 전작을 음미하려고만 했다. 가볍다 못해 트리니티처럼 날아오를 것 같은 킬링타임용 영화, 하지만 시간은 더럽게 안 가는 영화.
더 라스트 오브 어스 2와 매트릭스 리저렉션. 뭐가 더 좋은가? 나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 2가 좋다. 이들은 그나마 절박하기라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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