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진구 화양동에 3년간 살았다. 난 비가 좋았다. 밤새 밖에 저 20대 초반 애들이 술집 앞에서 소리 지르는걸 어느 정도 막아준다. 거리에 빼곡하게 뱉은 침과 담배꽁초를 씻어준다.
집 앞에 2900원짜리 안주 파는 술집이 있었다. 하필 내 집 앞에 있었고 돈 없는 20대 아이들은 그 술집에 매일 바글바글 모여 소리 지르고 술을 먹었다. 포장마차 컨셉으로 슝슝 뚫린 비닐에 간이 테이블들을 꽉꽉 채워 넣어 매일 새벽 5시까지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나는 그때 대한민국이 총기 소지가 금지된걸 감사히 여겼다. 총이나 대포가 있다면 무차별 난사를 하고 싶었던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미국이었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미국은 저주받은 국가다. 미국은 총기 산업을 너무 키워버렸다. 8000만명이 총기를 소유하고 있다. 당신이 정치인이라면 금지시킬 수 있겠는가? 1년에 600건 이상의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는데 진보진영도 총기 소지를 금지하는 법안을 내질 못한다. 담배산업보다 훨씬 심각하다. 자살 포함 총기 살인은 연당 5만 명에 육박한다. 미국은 장차 자본주의의 실패한 사례로 꼽힐 것이다.
트래비스는 1970년대 뉴욕 맨하탄의 오갈 데 없는 외롭고 무기력한 청년이다.
남자는 짐을 들고, 책임을 지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배시는 트래비스가 그 무기력을 어떻게든 없애보고자 책임지기로 선택한 여성이다.
배시와 사랑을 하고 그녀를 책임지고 싶지만 첫 데이트에 포르노를 보여주면서 실패한다.
트래비스는 더 무력해진다.
트래비스는 이 무력함을 또 타파하려 한다. 다만 무력감을 원천 봉쇄하기 위하여 총을 구입한다. 하나가 아니라 눈에 보여준 모든 총을 산다. 트래비스는 그만큼 절박한 것이다.
단골 슈퍼에 강도질을 하는 아이를 주저 없이 쏴버리며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이후 배시를 타락시킨(그렇게 믿고 싶은) 대통령 후보를 암살하려 한다. 허나 그는 시도조차 하질 못한다. 그 이후는 미성년자 매춘을 주선하는 포주를 목표로 삼는다. 그는 이들을 살해하고 매춘을 한 미성년자 가출 청소년 아이리스를 구출하기에 이른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나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갱단을 죽인 정의로운 '택시 드라이버'로 신문에 소개되고 자신의 유일한 공동체인 동료 택시 운전수들과 배시에게 인정을 받는다.
이때의 여유로운 트래비스의 표정이 중요하다. 포주를 죽이고 자살까지 하려 했던 그의 번뇌는 아이리스를 구하는데 '성공'하고 사회가 '인정'해 줌으로써 해소되고 삶을 찾는다.
이 영화는 그냥 잘 만든 게 아니라 이 인물에 흡입된다. 마치 최면 걸 때 편안한 기분과 내담자와의 신뢰, 안정이 중요한 것처럼 트래비스에게 감정 이입할 충분한 여지를 준다. 조급하지 않은 연애 많이 해본 사람의 편안한 접근이랄까?
인간은 공동체가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편리함을 추구하다 보면 대머리 택시 선배 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조언을 하게 된다. 책임은커녕 무지하면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단어를 나열하는 저급함. 뭔가 말해주려는 따스함은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인생도 모르고 동료도 모른다. 개인이 아닌 사회가 이렇게 헛살면 안 된다. 편함의 대가로 외로움을 얻으면 안 된다. 우린 서로에게 관심이 필요하다.
총이 어떤 의미에서 긍정적인 수단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마약은 관심 없고 오로지 총만 샀고, 총으로 남을 죽여 자신의 삶을 구제했다. 천상 미국인스러운 생각이라 하겠다. (거기에 이탈리아의 피까지)
1970년대 뉴욕 맨하탄의 외로운 청년의 인생에 흠뻑 젖어버릴 수 있는 영화. 본인이 외롭다면 헤어 나오는데 약간 어려울 수 있으니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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