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한국에서 몇 년을 살고 한국사회를 4가지로 규정했다.
1. 끝없는 경쟁
2. 극단적(하이퍼) 개인주의
3. 일상의 사막화
4.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
나는 이중 극단적 개인주의와 일상의 사막화가 참 와닿았다. 매일 새벽 3~ 4시까지 컴퓨터 게임하면서 중학생 3명이 소리 지르는 게 내 귀에 울리는데, 아이 3명이나 키우시느라 고생하신다며 배려할 수 있겠는가? 윗집에 남자아이 3명 사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웃사촌은 옛말이다.
베라르디는 한국사회가 이렇게 된 결과가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로 이어진다고 했다.
일본 거장 감독이자 영화 브로커의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이런 고민을 하고 영화를 만들었는지 의문이다. 한국사회가 따스해 보이는가? 아니면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던 걸까?
인신매매(불법 입양)와 살인으로 감추려 했지만 그 미숙한 접근을 감추지 못한 영화다. 감독의 한국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걸 표현하고 싶은 잠재적 욕구가 주인공들의 상황에 맞지 않는 과한 가족애로 변질된다. 변질된 가족애는 다시 인신매매와 살인으로 상충되면서 영화는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버무려진다. 어울리지 않는 음식으로 만든 비빔밥처럼.
우성이라는 아기는 '구원'의 상징이다. 이 아이를 안아본 사람은 전부 구원받는다. 엄마인 소영은 물론이고 동수와 상현, 수진과 아이를 사려고 했던 부부까지 구원한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눈부시고 행복한 결말이다. 감독은 말한다. 아이가 우리 사회의 미래다. 아이를 통해 당신의 인생은 구원받을 수 있다. 감독이 훌륭한 분인건 확실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아이 아빠를 죽이고 자기 아이를 팔러 다니는 여자, 아이를 팔러 다니는 사채 쓴 브로커, 엄마 얼굴도 모르고 고아원에서 자라 교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브로커가 어떤 괜찮아 보이는 타인을 만난다고 해서 자신의 가면을 벗고 마음을 여는 게 가능할까? 이건 순수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순진한 게 아닐까? 도약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지금 한국을 1990년대 전후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OECD 자살률 1위, 출산율은 1.0 미만으로 압도적인 꼴찌다. 그런 사회의 가장 암울한 계층의 사람들이 아이 팔러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을 좀 좋아 보이는 사람 같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 된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좋은 배우들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시나리오를 쓸게 아니라 그 전에 적어도 1년은 한국에 살아 봤어야 했다. 그래야 한국이 얼마나 세계 최고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지닌 국가로 변모했는지 가늠이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처한 상황에 비해 등장인물들이 너무 사람답고 아름답다.
의심가는 지점이 이 부분이다. 등장인물이 모두 처연하고 아름다운 이유가 무엇일까? 감독은 왜 아기 우성이를 통해
모두를 구원한 걸까?
혹시 감독이 한국에 대한 연민에 빠진게 아닐까?
알다시피 한국은 역사적으로 일본에게 심하게 착취당했고 그에 대한 보상이나 사과를 제대로 받지 못한 역사를 살아나가고 있다. 역사를 제대로 인식한 훌륭한 일본인으로서 그에게 대한민국은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잠재된 마음속에 대한민국을 구원하고 싶고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면 어떨까? 그 한국인들과 함께 영화를 제작한다면?
스피노자는 연민을 '우리들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표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라고 정의했다. 타인의 불행을 발견하고 자신도 슬픔을 느끼는 감정이다. 언듯 보면 동정과 유사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연민의 문제는 자신도 슬픔을 느끼는데 있는 게 아니라 '타인의 불행을 발견'하는데 있다. 연민의 대상이 된 타자는 그 자신이 불행할 때 나에게 슬픔으로 자극을 준다. 즉 타인의 슬픔을 발견하고 그에 따른 부산적 감정들 (그래도 나는 이렇게 비참하지 않다는 자기 정당화, 남을 도와준다는 기쁨 등)을 처리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타인의 불행을 먹고 사는 기생충' 이 탄생한다. 연민은 기생충 같은 감정이다. 나와 연민의 대상이 된 상대 모두를 서로 위하는 척 하는 거짓 기쁨을 주면서 아주 천천히 갉아먹는다.
만약 그렇다면 잘못 짚었다. 이제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여러모로 앞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경쟁력도 그렇고 어찌 보면 일본 이상으로 두꺼운 가면을 쓰고 타인을 맞이한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하면서 무관심이라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였지만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애써가며 서로 무관심한 '척' 한다.
감독에게 요구하지 않는 연민을 받은 기분,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처량한 사람 취급받은 기분이 드는 영화다.
이 영화는 대사가 안 들려도 너무 안 들린다. 내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언어가 한국어인데 알아들을 수가 없어 답답했다. 중저음의 남성 대사는 입모양이나 앞뒤 상황으로 유추해야 영화의 서사를 함께 할 수 있다. 단순히 영화만의 문제라기보단 메이저 브랜드 영화관의 룸 어쿠스틱도 형편없다. 수진(배두나), 이형사(이주영)는 영화 내내 차 안에서 잠복하는데 나오는 씬마다 뭘 먹는다. 안 그래도 대사가 안 들리는 영화에 계속 먹으면서 뭉개지는 발음으로 대사를 하니 설상가상이다. 유튜브 먹방 비슷한 느낌이 난다.
어쨌든 출연진의 매우 훌륭한 연기와 한국사회에 가장 중요한 '아이'의 가치 절하에 대해 한번 콕 찌르는 좋은 영화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2022년 한국의 정서와 맞지 않는 시나리오, 심지어 대사가 잘 안들리는 아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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